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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태는 순환 ? 다시 힘을 내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1-23 조회 1742
내용
한 해가 끝나고 다시 한 해가 시작되는 즈음이면 우리는 시작과 끝, 출발과 도달이라는 개념을 새삼스레 되새겨보게 된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 해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송년이라든지 새해라는 시점은 단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다. 해마다 있었고 해마다 반복되는 한 숫자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한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생일이라든가 기일이라는 것도 그렇다. 때문에 이런 숫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축하하거나 기념하는 일도 단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할 뿐 ‘과학적 의미’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새삼스러울 것 없이 늘 되풀이되어온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날짜는 단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한 것인가. 막상 그렇게 단정지으려고 보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한 해의 순환을 절기로 나눈 전통적 개념을 돌아보면 이 개념들이 그리 만만하게, 아무렇게나 이름 지었어도 상관없을 듯한 것은 아니다. 춘분, 추분, 하지, 동지와 같은 명칭들은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주기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과학적 근거가 너무나 뚜렷하다는 것이다. 단지 어느 순간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고 끝으로 삼느냐 하는 문제는 제기할 수 있을지언정, 하루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거나 가장 길거나 가장 짧은 날을 지정한 절기의 구분은 놀랍도록 과학적이다.
그러니 하루 해가 가장 짧은 동지를 기점으로 삼는 것과 양력이나 음력의 1월1일을 기점으로 삼는 것 중 어느 것이 생활에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하느냐 하는 논쟁은 있을 수 있어도, 어느 하루를 한 해의 시작과 끝으로 정하는 일 자체의 타당성은 부인할 수가 없다.

시간의 순환이 갖는 중요성은 농경시대일수록 중요했다.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일이야말로 ‘제때’를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간 순환의 중요성이 희박해진 것은 농업시대로부터 멀어진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도시인들에게는 입춘 우수가 반드시 2월이어야 할 이유가, 입추 처서가 반드시 8월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대신 시간과 분초까지를 지칭하는 시간이란 숫자가 더 중요해졌다. 가게의 문을 열고 닫는 시간, 월세나 대출금 이자를 보내야 할 시한, 기차가 도착하고 출발하는 시각 같은 것이 사회적 약속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작과 끝은 편리한 점이 있다. 한 해의 농사가 잘못되었더라도 다시 잘 지어볼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잘 된 농사도 잘못된 농사도 그 시한은 정해져 있다. 농사일 같으면 일년 단위로 갱신된다. 매일매일 갱신되는 일도 있고 월 단위로, 주간 단위로 갱신되는 일도 있다. 끝이라는 것은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 때마다 우리는 다시 시도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것은 시간의 순환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최대의 축복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한 생애를 놓고 볼 때, 시간의 순환이 마냥 축복일 수는 없는 것 같다. 새로 계획을 세우고 실퍠했거나 헛걸음친 일을 새로 시작해볼 기회는 해마다 다시 주어지는 것 같지만, 생애라는 큰 주기를 놓고 보면 지난해의 시작과 올해의 시작은 같은 시작점이 아니다. 벼 한 포기가 잎을 내고 줄기를 뻗어 이삭을 결실하는 것처럼, 한 사람의 생애는 어린 시절을 거쳐 청년기와 중장년기 노년기로, 아주 느리지만 조금도 멈추지 않고 꾸역꾸역, 단 한 번의 기승전결로 이어져 간다. 생로병사가 한 생명에게 유일회적으로 주어질 뿐, 다시 젊어지거나 불생불멸의 삶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게 있다면, 이 순환의 법칙을 거슬러보려고 애쓰는 일보다는 이 순환에 순응하면서 스스로 절기에 어울리는 역할을 찾는 일일 것이다. 젊어서는 열심히 노력하여 공부하고 일을 하면서 기운을 내고, 한 여름에는 짙푸른 잎을 뽐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길러내며, 나이가 들면 조용히 잎을 떨궈 열매가 햇볕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물러서는 일이 모두 이 시간의 순환 속에서 깨닫게 되는 일이다. 단풍이 곱게 들지 못했다고 시간을 거슬러 다시 시작할 수 있겠으며, 열매가 충실하지 못하다고 떨구고 꽃부터 다시 피울 기회가 있겠는가.
이 시간 앞에서 되새기게 되는 것은 꽃피우는 일도 열매 맺는 일도 다 때가 있다는 것이며,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보다는 아직 지나가지 않은 시간이라도 이전보다는 더 충실하게 살아낼 계획을 갖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새해’가 주어진다는 건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미다. 지난해를 다시 반복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지나간 해를 밑거름으로 삼아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는 생각으로 다시 힘을 내자. NM

이은주 밝은 성 연구소 원장